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문단 편집) == 생애 == 일본 [[도쿄]] 출생. 본래 성은 니하라(新原)이나, 12세에 외삼촌에게 입양되어 외가의 성인 아쿠타가와를 쓰게 된다. 아버지의 사업실패, 누나의 요절로 인한 어머니의 발광 때문에 제대로 된 양육을 받을 수 없어서라고 한다. 양아버지인 외삼촌이 [[에도 시대]] 문예에 관심이 있어, 그에 영향을 받았다. [[1913년]], [[도쿄제국대학]]에 입학했다. [[1914년]], 고등학교 동창이던 구메 마사오(久米正雄), 기쿠치 간(菊池寬)[* 본명 기쿠치 히로시. 이 사람은 나중에 [[아쿠타가와상]]을 제정한다.] 등과 제3차 '신사조(新思潮)'를 발간하여 첫작품 〈노년〉(老年)을 발표하였다. 이어서 [[1915년]], '데이코쿠분가쿠(帝国文学)'에 대표작 〈[[라쇼몽]]〉을 발표하고, 그해에 [[나쓰메 소세키]]의 '목요회'[* 매주 목요일에 소세키의 자택에서 열린 모임. 당대의 소설가나 학자가 참가하였으며 다양한 주제에 대한 회합을 가졌다고 한다.]에 참석하게 된다. [[1916년]], 제4차 신사조에 〈[[코(동음이의어)#s-4|코]]〉(鼻)를, 신소설에 〈참마죽〉(芋粥)을 발표하여, 나쓰메 소세키의 격찬을 받으며 문단에 진출했다. 대학을 졸업한 후, 해군기관학교에 들어가 영어교관으로 근무했다. 그러나 군인들에게 영어강의를 하면서 [[무기여 잘 있거라]]와 같은 반전(反戰)소설만 잔뜩 소개하다가 1년 뒤, 교직에서 물러났고, 오사카의 [[마이니치 신문]][* 후에 마이니치 신문 오사카 지부가 된다. 도쿄에 있던 니치니치 신문(日日新聞)이 마이니치 신문 도쿄 지부가 된다.]에 사우(社友)[* 정식 사원은 아니지만 사원으로서의 특정한 대우를 받는 직책. 명예사원과는 조금 다르다. 友라고 번역한 것에서 보듯 영미권의 fellow에 해당하는 직책이다. 한국어로 하면 객원기자 같은 지위.]로 들어가 본격적인 창작활동에 돌입하며, 해외 특파원도 겸 하는 등, 이 시기가 아쿠타가와에게 있어서 가장 윤택한 시기였다고 한다. 그러나, 본래 [[http://www.amc.seoul.kr/asan/healthinfo/disease/diseaseDetail.do?contentId=32183|늑막염]], 위장병 등으로 병약했던 체질과, 어머니의 [[발광]]에 따른 신경쇠약의 악화[* 자신도 언젠가 발광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에 평생 시달렸다고 한다. 가장 심할 때는 흡연량이 무려 '''하루 9갑 반'''이 될 정도였다고 한다.]로 인해 요양생활을 하게 된다. 거기에 집안사정[* 매형이 방화, 보험금 사기에 연루되어 빚을 안고 도망다니다 철도에 뛰어들어 자살하는 사건이 있었다. 그로 인해 매형의 빚은 고스란히 아쿠타가와 부부가 떠맡게 되었다고. 이는 만년의 소설〈톱니바퀴〉에서도 서술되어 있다.], 만년에는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대두 등 시대의 동향에 적응하지 못하여 회의와 초조, 불안감,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이 시점에 동료 문인이자 정신과 의사였던 [[사이토 모키치]]에게 진료를 받고, 조언을 듣기도 했다. 사이토 모키치는 아쿠타가와의 신경쇠약과 불면증을 걱정하며 [[수면제]]인 [[바르비탈]]을 처방해줬는데, 후술하겠지만 이는 불행의 씨앗이 되었다. 모키치의 진료에도 결국 심한 신경쇠약에 빠져 몇몇 지인들에게 편지와 원고, 그리고 〈나의 장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僕の将来についたぼんやりとした不安)이라는 내용이 담긴 유서 <어느 옛 벗에게 남기는 수기(或舊友へ送る手記)>를 남기고 [[1927년]] [[7월 24일]] 35세의 젊은 나이에 수면제 [[바르비탈]] 과다 복용으로 [[음독#s-2]] [[자살]]하였다. 같은 소세키 문하의 친구이자 선배인 우치다 햣켄(内田百閒)에 따르면, 아쿠타가와가 자살하기 며칠 전 찾아갔을 때 그는 그 시점에서 이미 대량의 수면제에 취해 몽롱한 상태로, 깨어 있는가 싶으면 어느샌가 다시 잠들어 있는 상태였다고 한다.[* 자살을 결심하고 서서히 수면제에 내성을 길렀던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또한, 아쿠타가와는 죽기 직전 즈음에 가까운 지인과 친구들을 방문했으나, 결국 모두 만나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는데, [[7월]] 초에는 기쿠치 칸을 만나려고 두 차례 문예춘추사를 찾아갔지만 만나지 못했고[* 이때 문예춘추사 직원이 기쿠치에게 아쿠타가와가 왔었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은 바람에, 결국 기쿠치는 아쿠타가와가 살아 있는 동안 찾아가 보지도 못했다고 한다.], 자살하기 바로 전날에는 한동네에 살았던 시인 무로오 사이세이(室生犀星)를 찾아갔으나, 그때 사이세이는 잡지 취재로 우에노에 나가 있었던지라 역시 만나지 못했다. 이 때문에 사이세이는 당시 아쿠타가와를 만나지 못했던 일을 두고 "만약 내가 외출하지 않았다면 아쿠타가와 군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자살을 말리고 싶었다"라며 만년까지 두고두고 후회했다고 한다. 죽기 전, 친구였던 구메 마사오에게 〈어떤 바보의 일생〉(或阿呆の一生)이란 작품을 건네었다. 해당 작품을 읽어보면 냉소적인 자세와 삶에 대한 열망이 어지럽게 교차되어 묘사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마지막 작품이라고도 일컬어지는 〈톱니바퀴〉는, 그가 만년에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어떠한 것에 시달렸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사후 수면제를 처방했던 모키치는 큰 충격에 빠져 그의 빈소를 방문한 이후 한동안 모습을 비추지 않았다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사이토 모키치]] 문서로.[* 웹 게임 [[문호와 알케미스트]]에서 플레이어블 캐릭터로 등장한 사이토 모키치의 대사 중 환자를 떠나보내는 것이 힘들다는 뉘앙스의 대사가 있는데, 실제의 모키치가 아쿠타가와의 자살 소식에 충격을 받고 칩거했던 일을 반영한 대사로 추정된다.] 영화화된 '남경의 그리스도'의 남자 주인공(여기서는 [[양가휘]]가 연기했다.) 오카가와 유이치로의 캐릭터 설정이나 결말부분도 아쿠타가와를 모티브로 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